Z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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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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看話禪 참구의 실제
- 無字 화두를 중심으로 -
김영욱 / 가산연구원
차 례
Ⅰ. 화두의 일반적 속성
Ⅱ. 五祖法演의 無字 제기
Ⅲ. 무자 공부의 병통
1) 有․無와 眞無의 병통
2) 忘懷와 管帶
Ⅳ. 화두 참구의 바른 방향
1) 빈틈이나 끊어짐이 없는 공부
2) 일상의 진실과 화두 참구
Ⅴ. 결론
I. 화두의 일반적 속성
무자 화두는 趙州從諗(778~897)의 문답을 기원으로 한다. 그러나 조주가 학인과 나눈 문답 자체에 간화선에서 말하는 방식의 화두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무자 화두란 조주의 문답을 대상으로 하여 그것을 궁구하는 또 하나의 문제제기 방식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종일관 모색할 단서를 끊어놓는 방법이 그것이다. 물들거나[觸] 등지는[背] 어느 편도 허용하지 않은 채 설정하는 관문 곧 背觸關 등이 문제를 화두로 만드는 대표적인 방법으로 활용된다. 이것은 간화선이 본격적으로 개시되기 이전에 여러 조사들의 문답에서 충분히 발견되는 요소이다. 간화선은 이 방법을 수행의 틀로 정착시켜 중심 과제로 제기했던 것이다.
이 방법에 따라 조주무자를 간화선의 관점에서 접근한 최초의 선사는 五祖法演(1024~1104)이다. 그의 스승인 白雲守端(1025~1072)도 무자를 화두로 든 적이 없고, 법연의 제자인 圜悟克勤(1063 ~1125)도 조사의 공안을 중심 수단으로 삼고 간화의 방법으로 그것을 궁구했지만 무자 화두를 특별히 내세운 예는 볼 수 없다. 무자를 그 특징적인 공부법과 더불어 풍부한 내용을 가지고 다시부각시키는 역할은 이 법맥에서 원오의 뒤를 이은 大慧宗杲(1089~1163)의 몫으로 돌아간다.
조주무자에 대한 탐구는 화두 공부의 전반적 실태를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무자를 중심으로 간화선 수행의 면모를 밝히기에 앞서 화두 일반이 가지는 특징을 예비적으로 들어 본다.
화두는 개념적 사고나 특정한 인식 범주를 수단으로 하여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화두에는 어떤 분별도 들어설 여지가 없다. ‘잡을 수 있는 수단이 전혀 없고(沒巴鼻) 아무 맛도 없다(無滋味)’거나 ‘손잡이가 없는 쇠망치(無孔鐵鎚)’같다거나 하는 등의 비유는 이렇게 어떤 길로도 통하지 않는 화두의 본질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 화두를 공부하는 사람이 그 본질을 실현하게 되면 ‘마음으로 모색할 길이 끊어졌다(心路絶)’고 한다.
종사들이 제시한 뜰앞의 잣나무․마삼근․구자무불성 등의 화두에는 단적으로 분명하게 보이는 법은 전혀 없다. 다만 아무 맛도 없고 모색할 수단도 없는 화두를 준 다음 그에 따라 “분별 의식이 타파되지 않았을 경우 망상의 불은 더욱 치열해진다. 바로 이럴 때 다만 의심하고 있는 화두를 놓치지 말고 들라”고 경계의 말을 할 뿐이다.
‘단적으로 분명하게 보이는 법이 없다’는 말은 그 뒤에 ‘맛이 없고 모색할 수단이 없다’는 말과 호응한다. 잣나무․마․개․불성 등 화두에 들어 있는 어떤 말 속에서도 추론해 나갈 단서를 찾을 수 없다는 뜻이다. 화두는 그 어떠한 모색과 분별의 근거도 찾을 수 없도록 제시된다. 화두에는 어떤 것을 가리키는 단적이고 분명한 지시 내용은 없고, 그와는 반대로 예상되는 지시 내용을 모조리 무의미화시키는 기능이 부각된다. 위에서 인용한 대혜의 말이 그 뜻을 나타낸다. 곧 제시된 말에서 깊이 감추어진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가 있다고 미리 단정하는 분별을 타파하기 위하여 화두를 드는 것이다. 같은 의미에서 화두를 궁구하다가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른 상황을 하얀 눈과 얼음으로 덮여 도저히 오를 수 없는 銀山과 온몸을 던져도 뚫고 나가지 못하는 鐵壁에 비유한다.
이 일련의 말들은 화두 공부를 시작하여 도달해야 할 저편 먼 곳에 있는 경지에 대한 묘사가 아니다. 모든 화두는 밟고 올라갈 점차적 단계가 주어지지 않고 처음부터 곧바로 이 은산철벽의 뜻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주어졌다고 하여 화두를 공부하는 각 사람에게 화두가 그 본질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주어진 화두에 대하여 잡거나 맛보려 하며 이리저리 다양한 이론과 개념을 근거로 모색하고 분별하는 잘못을 범한다. 화두에 그렇게 모색할 단서가 있다고 믿는 순간 그것은 망상분별을 촉발하는 대상이 될 뿐이다. 간화선에서 말하는 10종병을 비롯한 다양한 병통들은 포착할 도리가 없는 화두를 이처럼 분별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에서 생긴다.
이상의 내용에 따르면 화두 ‘無’는 있느냐 없느냐 하는 논란거리가 아니라 이를 놓고 벌어지는 모든 분별과 논란을 잠재우기 위한 수단으로서 주요한 뜻을 가진다. 대혜가 “이 無라는 한 글자는 허다하게 잘못된 지각을 꺾어버리는 무기이다”라고 한 말이 그 의미이다. 화두가 무기로 성립되는 이면에는 ‘의심’이라는 본질적이며 부단한 작용이 있다. 참구하는 화두를 의심하고 또 의심하지만 그것을 분별하거나 경전 등에서 근거를 찾는 등 다른 것에 의지하려 해서는 안 된다. 無 자체는 어떤 맛도 없는 虛한 것이므로 그것에서 實을 분별하기 위하여 돌아보는 순간 함정에 빠지는 것이며 속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조사들이 처음부터 분별할 여지가 없는 평범하고 싱거운 말을 던지는 경우는 결과적으로 이 뜻에 부합된다. 이와는 달리 풍부한 내용과 심오한 개념을 가지고 특정한 무엇을 가리키는 듯한 말을 가장하는 화두도 있지만 이것은 그 화두에 붙는 분별을 유도해 내어 제거하기 위한 것이 대부분이다. 있다고 했건 없다고 했건 화두로 제시된 말들은 따라가 잡을 수 있는 ‘그 무엇’이 없는 것이다. 화두는 모든 헤아림을 틀어막아 아무 맛도 없는 곳에 이르도록 하는 수단이다.
단지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는 모든 곳에서 항상 화두를 놓치지 말고 들어야 합니다. “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 ”고 한 문답을 말입니다. 들고서 놓치지 않는 공부가 무르익게 되면 입으로 말하거나 마음으로 생각하는 수단이 미치지 못하여 마음 속에서만 무수하게 오르락내리락할 것이니 마치 쇠말뚝을 씹은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이렇게 어떤 맛도 없을 때 결코 뜻을 굽히지 마십시오. 이와 같은 시기에 이르렀을 때가 바로 좋은 소식인 것입니다.
화두를 의심하며 분별을 하나하나 버리다 본래의 뜻 그대로 쇠말뚝과 같이 몰자미하여 은산철벽에 이르면 어떻게도 손을 쓸 수 없는 경지가 된다. 이와 같이 의심의 정점에서 언어와 분별의 수단이 통하지 않는 시기가 좋은 소식이라 한 말은 어떤 의미일까? 太古普愚(1301~1382)는 말한다.
부처와 조사의 뜻을 깊이 믿고 모름지기 그 단적인 취지를 판별해야 한다. 마음이 곧 천진한 부처이거늘 어찌 힘들여 마음 밖에서 찾는가! 만사를 내려놓고 살펴보라. 길이 철벽과 같이 막혔을 때 망념이 모두 사라지리라. ; 다만 화두를 들고 사유분별이 미치지 않고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곳까지 밀어붙이면 이것이 바로 부처와 조사가 (생사윤회하는) 목숨을 던지는 경지인 것이다.
모색할 수단이 완전히 사라진 경계에서 망상이 사라지므로 화두가 몰자미성 그대로 구체화된 상태 곧 본분사가 완결된다는 뜻이다. 화두에 대하여 어떤 방식으로도 마음을 쓸 수 없는 이곳에 이르면 자연히 스스로 수긍하여 알아차릴 수 있다.모든 수단이 끊어져 망막하게 된 이곳이 궁극적 경지인 셈이다. 대혜가 이 소식을 말한다.
꾸준히 화두를 들고 항상 화두를 의심하다가 도리에 근거하여 알아차릴 방법이 전혀 없고 어떤 맛도 없어서 마음이 뜨겁고 답답하다고 느껴질 때가 바로 화두를 들고 있는 당사자가 목숨을 버릴 순간인 것이니 기억하고 또 기억하십시오. 이와 같은 경계를 보고서 물러나 그만두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이와 같은 경계가 다름 아닌 부처가 되거나 조사가 되려는 소식입니다.
이 경계에서는 어떤 언어나 행위도 통하지 않는다. 원오는 ‘마음과 부처’로 이루어지는 4구와 방․할을 모두 禪의 생기를 죽이는 死句라 하고, 어디에도 의지하거나 기대어 분별할 수 없게 된 곳을 선의 생명이 시작되는 活句라 하였다.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이 活句인가? 전혀 상관 없다. 마음도 부처도 아니라는 말이 활구인가? 전혀 상관 없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라는 말이 활구인가? 전혀 상관 없다. 상대가 문에 들어오자마자 할을 하는 것이 활구인가? 전혀 상관 없다. 단지 어떤 말이건 있기만 하면 모두 死句이다. 무엇이 활구일까? 알겠는가? 만 길의 봉우리에 외발로 서면 사방 팔면이 온통 암흑으로 뒤덮여 아무 것도 구별할 수 없다.
언어에 의존하는 어떤 구절이나 그 한계를 넘어서 표현하는 방과 할까지 모두 사구이다. 사구라는 것은 그 앞에서 따라갈 통로가 있다는 뜻이다. 그 모든 것이 전혀 쓸모 없는 물건이 되어 온통 암흑뿐이고 의지할 대상이 없는 상황이 마음의 길이 끊어져 백척간두에 도달한 소식이다. 여기가 바로 어떤 분별이나 말 또는 도리도 통하지 않고 화두의 본질적 속성이 살아 움직이는 활구의 소재처인 것이다.
II. 五祖法演의 無字 제기
무자를 화두 공부의 방식으로 제기한 법연의 다음 상당법문에는 무자 화두의 특징과 그것을 공부하는 기본적 방법이 잘 나타나 있다.
법좌에 올라 어떤 학인과 조주의 다음 문답을 들었다. “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無).’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이 있는데, 개는 어째서 없습니까?’ ‘그 놈에게는 業識이 있기 때문이다.’ ” 법연이 말한다. “대중들이여! 그대들은 평상시에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 노승은 평상시에 (이 문답을 두고) 단지 ‘無’라는 글자만 들 뿐 다른 궁리는 하지 않는다. 그대들이 이 하나의 글자만 뚫는다면 세상 사람들이 그대들을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뚫겠는가? 이미 훤하게 뚫은 사람이 있는가? 있다면 나와서 말해 보라. 나는 그대들이 ‘있다’고 말하기를 바라지도 않고, ‘없다’고 말하기를 바라지도 않으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대들은 어떻게 말하겠는가? 잘들 계시오.”
조주가 ‘없다’고 대답한 말에 대하여 ‘있다’․‘없다’․‘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는 세 가지 어떤 분별에도 기울지 말고 ‘오로지 무자만 들고’ 올바르게 말해 볼 것을 요구한다. 법연의 말은 “이 세 가지는 모두 집착된 분별 의식에 의존한 것이기에 덩굴에 다시 덩굴을 덧붙이는 격이다. 이것을 떠나서 어떻게 뚫을 수 있을까?”라고 달리 풀이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세 가지를 벗어난 다른 어떤 것에 해답이 감추어져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간화선에서 어떤 화두를 마주하고 곧 바로 철벽에 부딪히게 만드는 특유의 문제설정 방법이다. 무자를 두고 뚫고 나갈 통로가 어디에도 없고, 모색할 수단이 전혀 없어서 막막한 상황이 바로 이 무자가 화두로 성립되는 요건이라는 뜻이다.또한 이 화두를 수용하는 사람도 곧 바로 이 상황 앞에 설 것을 요구한다. 여기서 후대에 강조하는 화두에 대한 ‘의심’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법연 이후 간화선에서 모든 화두를 궁구하는 가장 기초적이며 긴요한 문제제기 방식이다. 법연이 다음과 같이 背觸關의 형식으로 한 말에 좀더 분명하게 그 의미가 드러난다.
주먹을 들고서 말했다. “주먹이라 부르면 수행을 해 본 적도 없는 것과 같은 꼴이며, 주먹이라 부르지 않으면 얼굴을 대하고 속이는 짓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제외하고는 보잘것없는 주먹도 얻을 수 없으리라.” ; 만일 禪이라 이해하면 經을 비방하는 것이며, 경이라 이해하면 선을 비방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 덩어리로 같다고 생각하면 어리석은 것이다. 이 함정에서 뛰쳐나오는 사람은 매일 만 냥의 황금을 쓸 가치가 있겠지만 만일 뛰쳐나오지 못한다면 (그 대가로) 그대를 잡아갈 곳이 있을 것이다.
주먹을 주먹이라 부르거나 부르지 않거나 모두 잘못된 것이지만 이 두 가지 장애를 벗어나서 모색하는 것도 해결책은 아니다. 화두로 제기된 한에서는 어떤 출구도 없기 때문이다. 두 가지 장애에 틀어 막혀 꼼짝 못하는 곳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화두가 우선적으로 유도하는 경계이다. 마찬가지로 禪이라거나 經이라고 각각 차별지어 이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두 가지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부정하여 통할 수 있는 길이 모두 막힌 상태에서 해결해 보도록 문제를 제기한다. 어떤 길도 보이지 않아서 갑갑하고 어두운 함정에 유폐된 듯한 곳은 절망의 경계가 아니라 화두를 타파할 수 있는 문턱에 이른 상태이다.
白雲守端이 법연을 인가하면서 “밤송이와 가시나무와 쑥과 같은 禪은 모두 그대의 것이로다”고 한 말에서 밤송이 등의 말은 몰자미한 화두를 가리키는 상징어로서 모두 씹거나 입에 넣고 맛볼 수 없는 대상을 나타낸다. 법연이 자신이 깨달은 계기를 전한 다음과 같은 말에도 이 뜻이 나타난다.
내가 제방을 10여 년 간 돌아다니고 온 세상을 공부하러 찾아다니면서 여러 분의 존숙들을 친견하고 스스로 일대사를 깨달았다고 생각하다가 浮山圓鑑의 회하에 이르러 입도 열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다. 뒤에 백운수단 문하에 이르러 쇠로 만든 시큼한 떡 하나를 씹고는 모든 맛이 갖추어진 경지를 알게 되었다.
입을 열 수 없는 경지는 어떤 맛도 없어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키며, 쇠로 만든 떡이란 그렇게 맛이 없는 화두를 나타낸다. 맛이 없는 화두의 참뜻을 알아차려 근본적인 취지를 깨달았으므로 역설적으로 모든 맛이 갖추어진 경지를 알게 되었다고 한 것이다. 법연은 바로 이 禪境을 체험한 것이며, 그것은 몰자미한 화두를 궁구하면서 얻은 결과이다. 화두가 타파될 조짐은 그것이 몰자미한 본래의 상태로 드러나는 순간에 온다. 대혜는 이렇게 말한다.
단지 화두만 보라. 걸어 갈 때도 들고 앉았을 때도 들며, 항상 화두를 들고 놓치지 않고 의심하다 보면 아무 맛도 없게 될 것이다. 그 때가 바로 화두가 타파되기 좋은 기회인 것이니 버려서는 안 된다.
이렇게 선택과 해결책이 전혀 없는 궁지로 몰아넣는 것이 간화선의 전형적인 문제제기 방식이며, 법연은 무자 화두뿐만 아니라 모든 화두를 이 관점에서 들고 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법연의 선법에 정통한 후대의 선사들은 모두 이 맥락에서 그 숨은 뜻을 들추어낸다. 그 선법의 중심이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자 화두에 대한 다음의 법문을 보자.
오조법연이 법좌에 올라 “개에게도 불성이 있을까? (조주는 ‘없다’고 했지만) 그래도 개가 고양이보다 10만 배는 낫다.”고 말한 뒤 법좌에서 내려왔다.
이 간결한 법문에는 위에서 보인 방식의 문제제기는 직접 드러나 있지 않다. 그 본래의 뜻은 무엇일까? 眞覺慧諶은 이 법연의 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재차 들어보였다.
夜參 때 국사가 오조법연이 법좌에 올라 “조주가 ‘개는 불성이 없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개가 고양이보다 10만 배는 낫다”고 한 말을 들고 평가했다. “말해 보라! 이것은 개의 말인가? 고양이의 말인가?”
혜심은 개의 말인지 고양이의 말인지를 의문으로 던짐으로써 그 전체를 통괄하는 맥락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것은 법연의 의도를 간파한 또 하나의 절묘한 화두인 것이다. 개의 말과 고양이의 말 중 어느 편을 결정하는 것에 혜심의 의도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혜심은 이 두 가지를 진퇴양난의 관문으로 만들어 궁구할 문젯거리로 들어보인 것이다. 따라서 애초에 제기된 “개가 고양이보다 10만 배는 낫다”는 법연의 말은 표면적인 형식과는 달리 두 놈의 우열을 결정하여 한 말이 아니다. 우열이라는 차별 등을 모두 포괄하여 분별을 하지 못하는 경계에 서도록 만든 것에 법연의 의도가 숨어 있었고, 혜심은 드러나지 않은 그 뜻을 보다 선명하게 나타낸 것이다. 마치 조주가 “業識”이라 한 대답이 개에게 불성이 없는 진실한 근거로서 들어보인 말이 아니라 몰자미한 말인 것과 같다. 법연이 “낫다”고 한 말은 의문에 대한 결정된 분별과 대답이 아니라 혜심이 “이것인가? 저것인가?” 하고 들어보인 의문과 다르지 않다. 법연은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잡아 보이는 듯했지만 사실은 무자를 철저하게 화두로 드러내기 위한 일종의 함정이었던 것이다.
오조법연이 말한다. “비유하자면 무소가 格子窓을 통과하는데, 뿔과 네 다리는 모두 통과하였으나 어째서 꼬리는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일까?”
無門慧開가 “지나가자니 죽음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고, 되돌아가자니 산산이 부서져 버린다. 이 작은 꼬리가 대단히 기괴하기도 하구나”라고 읊은 게송도 이 말을 화두로서의 관문으로 해설한 결과이다. 雲峰妙高가 이 말을 듣고 깨달아 “고래가 바닷물을 모두 삼키니 밑바닥의 산호가지가 드러난다”고 한 은유도 모든 분별이 사라져 마음이 더 이상 갈 곳이 없는(心無所之) 화두 공부의 궁극처를 묘사한 말이다.
법연의 법문에 대한 이상과 같은 해설들은 모두 간화선 일반의 관점에 입각한 것이다. 법연은 평상시에 어떤 화두보다 조주무자를 즐겨 제기하였는데, 학인이 그 뜻을 물음에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답하기도 했다.
조주가 드러낸 칼날이여! 서릿발같이 차가운 빛이 번득이는구나. 다시 ‘어떤 뜻이냐’라고 묻는다면 몸을 갈라 두 동강 내리라.
법연이 “낫다”고 한 말은 관문으로서의 함정과 같은 종류였다면 이 게송은 친절하게 자신의 뜻을 보여준다. “어떤 뜻이냐?” 하고 묻는다는 말은 모색할 내용을 미리 예상하고 접근하는 분별을 가리킨다. 이러한 분별을 잘라내어야 무자가 타파된다는 비유이다. 무자에 관하여 더 이상 묻지도 대답하지도 못하여 이에 관하여 “낫다”․“못하다”․“있다”․“없다”는 등의 어떤 맛도 볼 수 없고 아무 소식도 들을 수 없는 상태로 이끌기 위한 것이 이를 두고 벌이는 종사들의 다양한 설정이다.
따라서 그들이 의도적으로 설정한 표면적인 구절에서 결정된 해답을 찾으려는 시도는 그 책략에 걸려드는 것이다. 조주 무자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조주의 다른 문답을 해석하는 데도 적용될 수 있다.
조주가 대중에게 “나의 이곳에는 굴에서 나온 사자도 있고, 굴 속에 있는 사자도 있으나 다만 그 사자를 만나기가 어려울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 때 어떤 스님이 손가락을 퉁겨 그 말에 응답하자 조주가 “무엇인가?”라 물었다. “사자입니다.” “내가 사자라고 한 말이 벌써 잘못이었거늘 그대는 게다가 뛰거니 밟거니 사자 흉내를 내는구나.”
처음에 조주가 한 말은 사자라는 虛를 던져 대중을 시험하기 위한 장치이다. 학인이 사자라는 虛에 현혹된 채 대응한 잘못을 두고 조주가 다시 자신이 만든 장치를 거두어들인 것으로 이 문답은 마무리된다. 다시 말해서 조주의 사자를 근거로 해서는 어떤 해답도 추구할 수 없다는 점에서 몰자미한 화두와 통한다.
조사들이 본분을 드러내기 위하여 쓰는 말과 동작 그리고 棒․喝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虛의 뜻을 중요한 요소로 가지고 있다. 태고는 말한다.
덕산의 방을 꺾어버리고 임제의 할을 분쇄하여 어느 곳을 가서 어떤 사람을 만나도 속임을 당하지 않은 다음에야 비로소 풍월을 대할만하다.
제시된 화두를 實이라 오인하여 되씹으며 분별하면 속는 것이다. 이 잘못을 범하지 않아야 조사의 진실이 드러나지만 잘못된 분별을 하나씩 만나서 버리도록 하는 것이 화두 공부의 과정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화두나 그것을 해설하는 말들은 어느 것이나 마치 문양이 새겨지지 않은 도장과 같이 사유분별과 언어로 찍어낼 수 없다는 의미에서 虛이며 實이 아니다. 臨濟가 “산승이말하는 내용은 모두 일시적으로병을 치료하는 약과 같은 것으로 實을 가진 법은 아무 것도 없다.”고 한 말이나 원오가 “온갖 성인들이 설정한 기관에 떨어지지 않고 여러 조사들이 시험하기 위하여 제기한 함정에 노닐지 않는다.”라고 한 말도 이 의미를 나타낸다. 이러한 관점은 대혜종고가 조사들의 언어를 보는 핵심적인 근거이기도 하며, 그것은 모든 화두에 그대로 적용된다. 법연 계열의 선맥은 모두 글자를 새기지 않은 도장과 같이 찍어서 드러낼 수 없는 虛한 화두를 근본으로 하였던 것이다. 법연이 제기한 무자 화두를 해결하는 것이 불법의 존폐를 결정짓는 관문이라 한 대혜의 말도 법연이 간화법을 근본으로 하면서 무자 화두를 중시한 경향을 평가한 말이다.
III. 무자 공부의 병통
1. 有․無와 眞無의 병통
조주 무자는 화두라는 보편적인 기반에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고, 무자로 제시되었다는 점에서 가지는 개별적 특징도 있다. 무자의 개별적 특징은 주로 이 화두를 궁구하는 데 있어서 발생하는 잘못된 공부법과 관련되어 나타난다. 그것은 이 무라는 글자가 촉발시키는 몇 가지 추론의 단서에서 비롯된다. 대표적인 것은 유․무 二分에 입각하여 이 무자를 분별하는 것이다. 어떤 화두건 그에 대한 분별 자체가 바른 공부법은 아니지만 유․무 이분은 조주가 “無”라고 대답한 말로 인하여 촉발되는 특징적 분별이라 할 수 있다. 眞無도 이 분별의 연장선상에 있다.
무자는 조주가 개의 불성이 “없다”고 대답한 말을 궁구하는 것이다. 여기에 “있다”고 한 대답까지 포함시켜 결국은 조주가 있다거나 없다는 대답을 모두 한 것으로 제시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화두인 이상 이 두 가지 사이에는 큰 차별이 없으며, 효과적으로 화두를 들어보이기 위한 의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보통 무자 화두라 하면 이렇게 유․무 두 가지로 주어진 것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관건이 달려 있다. 무자 화두에 대한 慈受懷深(1077~1132)의 게송을 보자.
조주의 입 안에는 雌黃이 있으니 그가 말한 구절에서 누가 길고 짧은 차별을 볼 것인가! 우습다, 얼마나 많은 개들이 흙덩어리를 쫓아가며, 깊은 밤에 까닭 없이 빈집에 대고 짖고 있는가!
자황이란 이미 쓴 글자를 지워서 고치는 도구이다. 조주의 입 안에 자황이 있다는 비유는 무라고 하면 유로 지우고, 유라 하고서도 무로 지우는 수단으로서 이 화두에 대한 이해를 보여 준 것이다. 宏智正覺이 “개의 불성이 단적으로 있다고 말하면 뒤로 와서 오히려 없다고 말해 주며, 단적으로 없다고 말하면 앞으로 와서 오히려 있다고 말해 준다.”고 한 말도 개의 불성이 “있다” 하거나 “없다” 하거나 이 두 가지 답변에는 그 말 자체로 가리킬 수 있는 분명한 뜻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 두 종류의 말은 분별할 대상적 근거가 아니라 상호 소멸을 통하여 각각에 대한 망상분별을 막고 있는 것이다. 유와 무 어느 편이 주어지더라도 다른 한 편을 지우는 수단인 동시에 다른 편에 의해서 지워지는 잠정적 시설이다. 白坡亘璇(1767~1852)이 조주의 유․무 어느 답변이나 일단 주어지고는 자취를 덮어서 없애는 것이라 한 취지도 같은 뜻이다. 유건 무건 결정된 의미가 없고, 분별할 대상도 아니므로 두 가지의 우열을 따지며 궁구할 수 없음을 지시한다. 1․2구가 이렇게 해석된다면 3․4구는 위의 방식으로 설정한 조주의 관문을 오해하는 자들에 대한 냉소적 비판이다. 흙덩어리란 지우는 도구이기도 하고 지워지는 대상이기도 한 잠정적 설정과 상대적 수단으로서의 유와 무를 비유한다. 이 虛한 두 가지 말에 궁구할 實한 내용이 있는 듯이 착각하고 따라 다니는 것에 대하여 개가 흙을 던진 사람을 물지 않고 던져진 흙덩어리를 뒤쫓아가며 짖는 것에 빗댄 것이다.
法成枯木(1071~1128)도 유․무 분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힌다.
있다고 말하거나 없다고 말하거나 쓸데없이 남아도는 말은 없지만, 천 번 외치고 만 번 불러도 고개를 돌려보지 말라. 향기를 찾고 냄새를 쫓으며 다른 것에 미혹되어 따라다닌다면 공연히 시간을 보내고 세월만 허비하게 되리라.
향기와 냄새를 따른다는 말은 흙덩어리를 쫓는 개의 비유와 같은 맥락이다. 유․무 두 가지로 제시한 말에서 착각을 일으켜 분별의 단서로 그 말을 수용하는 일반적인 잘못을 예상하고, 친절하게 미리 방비해 준 것이다. 무자 화두는 이처럼 고개를 돌리고 찾을 만한 그 어떤 것이 숨어 있지 않다. 그러나 동시에 유․무가 자황과 같이 잘못을 교정하는 효용과 기능을 가진 것이기도 한 것이다.
조주 무자에 대한 遷福本逸(宋代 雲門宗)의 게송이다.
불성이 있다고도 하고 불성이 없다고도 하는구나. 똑바른 것을 뒤집었다가 뒤집힌 것을 다시 똑바르게 하네. 맑은 연못에 잠긴 달을 차서 없애고, 눈금없는 저울을 부러뜨려라. 물 속에서 불을 피우고 허공에 말뚝을 박는다. 이것을 눈먼 거북이가 죽은 뱀을 갉아먹는 것과 비교할 수 있으랴! 한 쌍의 어금니를 꽉 다물라.
“불성 ~ 하네”라는 구절은 조주가 번갈아 가며 제시한 유․무의 화두를 말한다. 건져올릴 수 없는 ‘잠긴 달’과 무게를 헤아릴 수 없는 ‘눈금없는 저울’은 그 화두의 몰자미한 속성을 말한다. 특정한 인식의 格에 속박된 ‘눈먼 거북이’가 ‘죽은 뱀’(死句)을 갉아먹듯이 표면적인 유․무의 뜻을 이러니 저러니 분별하는 것으로는 ‘물 속의 불’과 같은 몰자미한 格外의 화두로 제시된 조주의 유․무를 타파하지 못한다.
이상의 내용이 간화십종병의 분류로는 “있다․없다는 대립적 유․무의 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不得作有無會)”는 것에 해당된다. 유․무의 무라고 이해하는 병통은 무자 화두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병통이다. 곧 무라고 제시한 표면적인 말을 통하여 일어날 수 있는 가장 흔한 망상분별이다. 무자를 있다는 것과 대립되는 짝으로 분별하여 그와 관련된 여러 가지 관념을 해석 수단으로 삼아 분별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 無字 화두를 중심으로 -
김영욱 / 가산연구원
차 례
Ⅰ. 화두의 일반적 속성
Ⅱ. 五祖法演의 無字 제기
Ⅲ. 무자 공부의 병통
1) 有․無와 眞無의 병통
2) 忘懷와 管帶
Ⅳ. 화두 참구의 바른 방향
1) 빈틈이나 끊어짐이 없는 공부
2) 일상의 진실과 화두 참구
Ⅴ. 결론
I. 화두의 일반적 속성
무자 화두는 趙州從諗(778~897)의 문답을 기원으로 한다. 그러나 조주가 학인과 나눈 문답 자체에 간화선에서 말하는 방식의 화두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무자 화두란 조주의 문답을 대상으로 하여 그것을 궁구하는 또 하나의 문제제기 방식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종일관 모색할 단서를 끊어놓는 방법이 그것이다. 물들거나[觸] 등지는[背] 어느 편도 허용하지 않은 채 설정하는 관문 곧 背觸關 등이 문제를 화두로 만드는 대표적인 방법으로 활용된다. 이것은 간화선이 본격적으로 개시되기 이전에 여러 조사들의 문답에서 충분히 발견되는 요소이다. 간화선은 이 방법을 수행의 틀로 정착시켜 중심 과제로 제기했던 것이다.
이 방법에 따라 조주무자를 간화선의 관점에서 접근한 최초의 선사는 五祖法演(1024~1104)이다. 그의 스승인 白雲守端(1025~1072)도 무자를 화두로 든 적이 없고, 법연의 제자인 圜悟克勤(1063 ~1125)도 조사의 공안을 중심 수단으로 삼고 간화의 방법으로 그것을 궁구했지만 무자 화두를 특별히 내세운 예는 볼 수 없다. 무자를 그 특징적인 공부법과 더불어 풍부한 내용을 가지고 다시부각시키는 역할은 이 법맥에서 원오의 뒤를 이은 大慧宗杲(1089~1163)의 몫으로 돌아간다.
조주무자에 대한 탐구는 화두 공부의 전반적 실태를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무자를 중심으로 간화선 수행의 면모를 밝히기에 앞서 화두 일반이 가지는 특징을 예비적으로 들어 본다.
화두는 개념적 사고나 특정한 인식 범주를 수단으로 하여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화두에는 어떤 분별도 들어설 여지가 없다. ‘잡을 수 있는 수단이 전혀 없고(沒巴鼻) 아무 맛도 없다(無滋味)’거나 ‘손잡이가 없는 쇠망치(無孔鐵鎚)’같다거나 하는 등의 비유는 이렇게 어떤 길로도 통하지 않는 화두의 본질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 화두를 공부하는 사람이 그 본질을 실현하게 되면 ‘마음으로 모색할 길이 끊어졌다(心路絶)’고 한다.
종사들이 제시한 뜰앞의 잣나무․마삼근․구자무불성 등의 화두에는 단적으로 분명하게 보이는 법은 전혀 없다. 다만 아무 맛도 없고 모색할 수단도 없는 화두를 준 다음 그에 따라 “분별 의식이 타파되지 않았을 경우 망상의 불은 더욱 치열해진다. 바로 이럴 때 다만 의심하고 있는 화두를 놓치지 말고 들라”고 경계의 말을 할 뿐이다.
‘단적으로 분명하게 보이는 법이 없다’는 말은 그 뒤에 ‘맛이 없고 모색할 수단이 없다’는 말과 호응한다. 잣나무․마․개․불성 등 화두에 들어 있는 어떤 말 속에서도 추론해 나갈 단서를 찾을 수 없다는 뜻이다. 화두는 그 어떠한 모색과 분별의 근거도 찾을 수 없도록 제시된다. 화두에는 어떤 것을 가리키는 단적이고 분명한 지시 내용은 없고, 그와는 반대로 예상되는 지시 내용을 모조리 무의미화시키는 기능이 부각된다. 위에서 인용한 대혜의 말이 그 뜻을 나타낸다. 곧 제시된 말에서 깊이 감추어진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가 있다고 미리 단정하는 분별을 타파하기 위하여 화두를 드는 것이다. 같은 의미에서 화두를 궁구하다가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른 상황을 하얀 눈과 얼음으로 덮여 도저히 오를 수 없는 銀山과 온몸을 던져도 뚫고 나가지 못하는 鐵壁에 비유한다.
이 일련의 말들은 화두 공부를 시작하여 도달해야 할 저편 먼 곳에 있는 경지에 대한 묘사가 아니다. 모든 화두는 밟고 올라갈 점차적 단계가 주어지지 않고 처음부터 곧바로 이 은산철벽의 뜻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주어졌다고 하여 화두를 공부하는 각 사람에게 화두가 그 본질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주어진 화두에 대하여 잡거나 맛보려 하며 이리저리 다양한 이론과 개념을 근거로 모색하고 분별하는 잘못을 범한다. 화두에 그렇게 모색할 단서가 있다고 믿는 순간 그것은 망상분별을 촉발하는 대상이 될 뿐이다. 간화선에서 말하는 10종병을 비롯한 다양한 병통들은 포착할 도리가 없는 화두를 이처럼 분별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에서 생긴다.
이상의 내용에 따르면 화두 ‘無’는 있느냐 없느냐 하는 논란거리가 아니라 이를 놓고 벌어지는 모든 분별과 논란을 잠재우기 위한 수단으로서 주요한 뜻을 가진다. 대혜가 “이 無라는 한 글자는 허다하게 잘못된 지각을 꺾어버리는 무기이다”라고 한 말이 그 의미이다. 화두가 무기로 성립되는 이면에는 ‘의심’이라는 본질적이며 부단한 작용이 있다. 참구하는 화두를 의심하고 또 의심하지만 그것을 분별하거나 경전 등에서 근거를 찾는 등 다른 것에 의지하려 해서는 안 된다. 無 자체는 어떤 맛도 없는 虛한 것이므로 그것에서 實을 분별하기 위하여 돌아보는 순간 함정에 빠지는 것이며 속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조사들이 처음부터 분별할 여지가 없는 평범하고 싱거운 말을 던지는 경우는 결과적으로 이 뜻에 부합된다. 이와는 달리 풍부한 내용과 심오한 개념을 가지고 특정한 무엇을 가리키는 듯한 말을 가장하는 화두도 있지만 이것은 그 화두에 붙는 분별을 유도해 내어 제거하기 위한 것이 대부분이다. 있다고 했건 없다고 했건 화두로 제시된 말들은 따라가 잡을 수 있는 ‘그 무엇’이 없는 것이다. 화두는 모든 헤아림을 틀어막아 아무 맛도 없는 곳에 이르도록 하는 수단이다.
단지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는 모든 곳에서 항상 화두를 놓치지 말고 들어야 합니다. “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 ”고 한 문답을 말입니다. 들고서 놓치지 않는 공부가 무르익게 되면 입으로 말하거나 마음으로 생각하는 수단이 미치지 못하여 마음 속에서만 무수하게 오르락내리락할 것이니 마치 쇠말뚝을 씹은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이렇게 어떤 맛도 없을 때 결코 뜻을 굽히지 마십시오. 이와 같은 시기에 이르렀을 때가 바로 좋은 소식인 것입니다.
화두를 의심하며 분별을 하나하나 버리다 본래의 뜻 그대로 쇠말뚝과 같이 몰자미하여 은산철벽에 이르면 어떻게도 손을 쓸 수 없는 경지가 된다. 이와 같이 의심의 정점에서 언어와 분별의 수단이 통하지 않는 시기가 좋은 소식이라 한 말은 어떤 의미일까? 太古普愚(1301~1382)는 말한다.
부처와 조사의 뜻을 깊이 믿고 모름지기 그 단적인 취지를 판별해야 한다. 마음이 곧 천진한 부처이거늘 어찌 힘들여 마음 밖에서 찾는가! 만사를 내려놓고 살펴보라. 길이 철벽과 같이 막혔을 때 망념이 모두 사라지리라. ; 다만 화두를 들고 사유분별이 미치지 않고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곳까지 밀어붙이면 이것이 바로 부처와 조사가 (생사윤회하는) 목숨을 던지는 경지인 것이다.
모색할 수단이 완전히 사라진 경계에서 망상이 사라지므로 화두가 몰자미성 그대로 구체화된 상태 곧 본분사가 완결된다는 뜻이다. 화두에 대하여 어떤 방식으로도 마음을 쓸 수 없는 이곳에 이르면 자연히 스스로 수긍하여 알아차릴 수 있다.모든 수단이 끊어져 망막하게 된 이곳이 궁극적 경지인 셈이다. 대혜가 이 소식을 말한다.
꾸준히 화두를 들고 항상 화두를 의심하다가 도리에 근거하여 알아차릴 방법이 전혀 없고 어떤 맛도 없어서 마음이 뜨겁고 답답하다고 느껴질 때가 바로 화두를 들고 있는 당사자가 목숨을 버릴 순간인 것이니 기억하고 또 기억하십시오. 이와 같은 경계를 보고서 물러나 그만두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이와 같은 경계가 다름 아닌 부처가 되거나 조사가 되려는 소식입니다.
이 경계에서는 어떤 언어나 행위도 통하지 않는다. 원오는 ‘마음과 부처’로 이루어지는 4구와 방․할을 모두 禪의 생기를 죽이는 死句라 하고, 어디에도 의지하거나 기대어 분별할 수 없게 된 곳을 선의 생명이 시작되는 活句라 하였다.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이 活句인가? 전혀 상관 없다. 마음도 부처도 아니라는 말이 활구인가? 전혀 상관 없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라는 말이 활구인가? 전혀 상관 없다. 상대가 문에 들어오자마자 할을 하는 것이 활구인가? 전혀 상관 없다. 단지 어떤 말이건 있기만 하면 모두 死句이다. 무엇이 활구일까? 알겠는가? 만 길의 봉우리에 외발로 서면 사방 팔면이 온통 암흑으로 뒤덮여 아무 것도 구별할 수 없다.
언어에 의존하는 어떤 구절이나 그 한계를 넘어서 표현하는 방과 할까지 모두 사구이다. 사구라는 것은 그 앞에서 따라갈 통로가 있다는 뜻이다. 그 모든 것이 전혀 쓸모 없는 물건이 되어 온통 암흑뿐이고 의지할 대상이 없는 상황이 마음의 길이 끊어져 백척간두에 도달한 소식이다. 여기가 바로 어떤 분별이나 말 또는 도리도 통하지 않고 화두의 본질적 속성이 살아 움직이는 활구의 소재처인 것이다.
II. 五祖法演의 無字 제기
무자를 화두 공부의 방식으로 제기한 법연의 다음 상당법문에는 무자 화두의 특징과 그것을 공부하는 기본적 방법이 잘 나타나 있다.
법좌에 올라 어떤 학인과 조주의 다음 문답을 들었다. “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無).’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이 있는데, 개는 어째서 없습니까?’ ‘그 놈에게는 業識이 있기 때문이다.’ ” 법연이 말한다. “대중들이여! 그대들은 평상시에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 노승은 평상시에 (이 문답을 두고) 단지 ‘無’라는 글자만 들 뿐 다른 궁리는 하지 않는다. 그대들이 이 하나의 글자만 뚫는다면 세상 사람들이 그대들을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뚫겠는가? 이미 훤하게 뚫은 사람이 있는가? 있다면 나와서 말해 보라. 나는 그대들이 ‘있다’고 말하기를 바라지도 않고, ‘없다’고 말하기를 바라지도 않으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대들은 어떻게 말하겠는가? 잘들 계시오.”
조주가 ‘없다’고 대답한 말에 대하여 ‘있다’․‘없다’․‘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는 세 가지 어떤 분별에도 기울지 말고 ‘오로지 무자만 들고’ 올바르게 말해 볼 것을 요구한다. 법연의 말은 “이 세 가지는 모두 집착된 분별 의식에 의존한 것이기에 덩굴에 다시 덩굴을 덧붙이는 격이다. 이것을 떠나서 어떻게 뚫을 수 있을까?”라고 달리 풀이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세 가지를 벗어난 다른 어떤 것에 해답이 감추어져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간화선에서 어떤 화두를 마주하고 곧 바로 철벽에 부딪히게 만드는 특유의 문제설정 방법이다. 무자를 두고 뚫고 나갈 통로가 어디에도 없고, 모색할 수단이 전혀 없어서 막막한 상황이 바로 이 무자가 화두로 성립되는 요건이라는 뜻이다.또한 이 화두를 수용하는 사람도 곧 바로 이 상황 앞에 설 것을 요구한다. 여기서 후대에 강조하는 화두에 대한 ‘의심’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법연 이후 간화선에서 모든 화두를 궁구하는 가장 기초적이며 긴요한 문제제기 방식이다. 법연이 다음과 같이 背觸關의 형식으로 한 말에 좀더 분명하게 그 의미가 드러난다.
주먹을 들고서 말했다. “주먹이라 부르면 수행을 해 본 적도 없는 것과 같은 꼴이며, 주먹이라 부르지 않으면 얼굴을 대하고 속이는 짓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제외하고는 보잘것없는 주먹도 얻을 수 없으리라.” ; 만일 禪이라 이해하면 經을 비방하는 것이며, 경이라 이해하면 선을 비방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 덩어리로 같다고 생각하면 어리석은 것이다. 이 함정에서 뛰쳐나오는 사람은 매일 만 냥의 황금을 쓸 가치가 있겠지만 만일 뛰쳐나오지 못한다면 (그 대가로) 그대를 잡아갈 곳이 있을 것이다.
주먹을 주먹이라 부르거나 부르지 않거나 모두 잘못된 것이지만 이 두 가지 장애를 벗어나서 모색하는 것도 해결책은 아니다. 화두로 제기된 한에서는 어떤 출구도 없기 때문이다. 두 가지 장애에 틀어 막혀 꼼짝 못하는 곳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화두가 우선적으로 유도하는 경계이다. 마찬가지로 禪이라거나 經이라고 각각 차별지어 이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두 가지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부정하여 통할 수 있는 길이 모두 막힌 상태에서 해결해 보도록 문제를 제기한다. 어떤 길도 보이지 않아서 갑갑하고 어두운 함정에 유폐된 듯한 곳은 절망의 경계가 아니라 화두를 타파할 수 있는 문턱에 이른 상태이다.
白雲守端이 법연을 인가하면서 “밤송이와 가시나무와 쑥과 같은 禪은 모두 그대의 것이로다”고 한 말에서 밤송이 등의 말은 몰자미한 화두를 가리키는 상징어로서 모두 씹거나 입에 넣고 맛볼 수 없는 대상을 나타낸다. 법연이 자신이 깨달은 계기를 전한 다음과 같은 말에도 이 뜻이 나타난다.
내가 제방을 10여 년 간 돌아다니고 온 세상을 공부하러 찾아다니면서 여러 분의 존숙들을 친견하고 스스로 일대사를 깨달았다고 생각하다가 浮山圓鑑의 회하에 이르러 입도 열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다. 뒤에 백운수단 문하에 이르러 쇠로 만든 시큼한 떡 하나를 씹고는 모든 맛이 갖추어진 경지를 알게 되었다.
입을 열 수 없는 경지는 어떤 맛도 없어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키며, 쇠로 만든 떡이란 그렇게 맛이 없는 화두를 나타낸다. 맛이 없는 화두의 참뜻을 알아차려 근본적인 취지를 깨달았으므로 역설적으로 모든 맛이 갖추어진 경지를 알게 되었다고 한 것이다. 법연은 바로 이 禪境을 체험한 것이며, 그것은 몰자미한 화두를 궁구하면서 얻은 결과이다. 화두가 타파될 조짐은 그것이 몰자미한 본래의 상태로 드러나는 순간에 온다. 대혜는 이렇게 말한다.
단지 화두만 보라. 걸어 갈 때도 들고 앉았을 때도 들며, 항상 화두를 들고 놓치지 않고 의심하다 보면 아무 맛도 없게 될 것이다. 그 때가 바로 화두가 타파되기 좋은 기회인 것이니 버려서는 안 된다.
이렇게 선택과 해결책이 전혀 없는 궁지로 몰아넣는 것이 간화선의 전형적인 문제제기 방식이며, 법연은 무자 화두뿐만 아니라 모든 화두를 이 관점에서 들고 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법연의 선법에 정통한 후대의 선사들은 모두 이 맥락에서 그 숨은 뜻을 들추어낸다. 그 선법의 중심이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자 화두에 대한 다음의 법문을 보자.
오조법연이 법좌에 올라 “개에게도 불성이 있을까? (조주는 ‘없다’고 했지만) 그래도 개가 고양이보다 10만 배는 낫다.”고 말한 뒤 법좌에서 내려왔다.
이 간결한 법문에는 위에서 보인 방식의 문제제기는 직접 드러나 있지 않다. 그 본래의 뜻은 무엇일까? 眞覺慧諶은 이 법연의 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재차 들어보였다.
夜參 때 국사가 오조법연이 법좌에 올라 “조주가 ‘개는 불성이 없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개가 고양이보다 10만 배는 낫다”고 한 말을 들고 평가했다. “말해 보라! 이것은 개의 말인가? 고양이의 말인가?”
혜심은 개의 말인지 고양이의 말인지를 의문으로 던짐으로써 그 전체를 통괄하는 맥락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것은 법연의 의도를 간파한 또 하나의 절묘한 화두인 것이다. 개의 말과 고양이의 말 중 어느 편을 결정하는 것에 혜심의 의도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혜심은 이 두 가지를 진퇴양난의 관문으로 만들어 궁구할 문젯거리로 들어보인 것이다. 따라서 애초에 제기된 “개가 고양이보다 10만 배는 낫다”는 법연의 말은 표면적인 형식과는 달리 두 놈의 우열을 결정하여 한 말이 아니다. 우열이라는 차별 등을 모두 포괄하여 분별을 하지 못하는 경계에 서도록 만든 것에 법연의 의도가 숨어 있었고, 혜심은 드러나지 않은 그 뜻을 보다 선명하게 나타낸 것이다. 마치 조주가 “業識”이라 한 대답이 개에게 불성이 없는 진실한 근거로서 들어보인 말이 아니라 몰자미한 말인 것과 같다. 법연이 “낫다”고 한 말은 의문에 대한 결정된 분별과 대답이 아니라 혜심이 “이것인가? 저것인가?” 하고 들어보인 의문과 다르지 않다. 법연은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잡아 보이는 듯했지만 사실은 무자를 철저하게 화두로 드러내기 위한 일종의 함정이었던 것이다.
오조법연이 말한다. “비유하자면 무소가 格子窓을 통과하는데, 뿔과 네 다리는 모두 통과하였으나 어째서 꼬리는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일까?”
無門慧開가 “지나가자니 죽음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고, 되돌아가자니 산산이 부서져 버린다. 이 작은 꼬리가 대단히 기괴하기도 하구나”라고 읊은 게송도 이 말을 화두로서의 관문으로 해설한 결과이다. 雲峰妙高가 이 말을 듣고 깨달아 “고래가 바닷물을 모두 삼키니 밑바닥의 산호가지가 드러난다”고 한 은유도 모든 분별이 사라져 마음이 더 이상 갈 곳이 없는(心無所之) 화두 공부의 궁극처를 묘사한 말이다.
법연의 법문에 대한 이상과 같은 해설들은 모두 간화선 일반의 관점에 입각한 것이다. 법연은 평상시에 어떤 화두보다 조주무자를 즐겨 제기하였는데, 학인이 그 뜻을 물음에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답하기도 했다.
조주가 드러낸 칼날이여! 서릿발같이 차가운 빛이 번득이는구나. 다시 ‘어떤 뜻이냐’라고 묻는다면 몸을 갈라 두 동강 내리라.
법연이 “낫다”고 한 말은 관문으로서의 함정과 같은 종류였다면 이 게송은 친절하게 자신의 뜻을 보여준다. “어떤 뜻이냐?” 하고 묻는다는 말은 모색할 내용을 미리 예상하고 접근하는 분별을 가리킨다. 이러한 분별을 잘라내어야 무자가 타파된다는 비유이다. 무자에 관하여 더 이상 묻지도 대답하지도 못하여 이에 관하여 “낫다”․“못하다”․“있다”․“없다”는 등의 어떤 맛도 볼 수 없고 아무 소식도 들을 수 없는 상태로 이끌기 위한 것이 이를 두고 벌이는 종사들의 다양한 설정이다.
따라서 그들이 의도적으로 설정한 표면적인 구절에서 결정된 해답을 찾으려는 시도는 그 책략에 걸려드는 것이다. 조주 무자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조주의 다른 문답을 해석하는 데도 적용될 수 있다.
조주가 대중에게 “나의 이곳에는 굴에서 나온 사자도 있고, 굴 속에 있는 사자도 있으나 다만 그 사자를 만나기가 어려울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 때 어떤 스님이 손가락을 퉁겨 그 말에 응답하자 조주가 “무엇인가?”라 물었다. “사자입니다.” “내가 사자라고 한 말이 벌써 잘못이었거늘 그대는 게다가 뛰거니 밟거니 사자 흉내를 내는구나.”
처음에 조주가 한 말은 사자라는 虛를 던져 대중을 시험하기 위한 장치이다. 학인이 사자라는 虛에 현혹된 채 대응한 잘못을 두고 조주가 다시 자신이 만든 장치를 거두어들인 것으로 이 문답은 마무리된다. 다시 말해서 조주의 사자를 근거로 해서는 어떤 해답도 추구할 수 없다는 점에서 몰자미한 화두와 통한다.
조사들이 본분을 드러내기 위하여 쓰는 말과 동작 그리고 棒․喝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虛의 뜻을 중요한 요소로 가지고 있다. 태고는 말한다.
덕산의 방을 꺾어버리고 임제의 할을 분쇄하여 어느 곳을 가서 어떤 사람을 만나도 속임을 당하지 않은 다음에야 비로소 풍월을 대할만하다.
제시된 화두를 實이라 오인하여 되씹으며 분별하면 속는 것이다. 이 잘못을 범하지 않아야 조사의 진실이 드러나지만 잘못된 분별을 하나씩 만나서 버리도록 하는 것이 화두 공부의 과정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화두나 그것을 해설하는 말들은 어느 것이나 마치 문양이 새겨지지 않은 도장과 같이 사유분별과 언어로 찍어낼 수 없다는 의미에서 虛이며 實이 아니다. 臨濟가 “산승이말하는 내용은 모두 일시적으로병을 치료하는 약과 같은 것으로 實을 가진 법은 아무 것도 없다.”고 한 말이나 원오가 “온갖 성인들이 설정한 기관에 떨어지지 않고 여러 조사들이 시험하기 위하여 제기한 함정에 노닐지 않는다.”라고 한 말도 이 의미를 나타낸다. 이러한 관점은 대혜종고가 조사들의 언어를 보는 핵심적인 근거이기도 하며, 그것은 모든 화두에 그대로 적용된다. 법연 계열의 선맥은 모두 글자를 새기지 않은 도장과 같이 찍어서 드러낼 수 없는 虛한 화두를 근본으로 하였던 것이다. 법연이 제기한 무자 화두를 해결하는 것이 불법의 존폐를 결정짓는 관문이라 한 대혜의 말도 법연이 간화법을 근본으로 하면서 무자 화두를 중시한 경향을 평가한 말이다.
III. 무자 공부의 병통
1. 有․無와 眞無의 병통
조주 무자는 화두라는 보편적인 기반에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고, 무자로 제시되었다는 점에서 가지는 개별적 특징도 있다. 무자의 개별적 특징은 주로 이 화두를 궁구하는 데 있어서 발생하는 잘못된 공부법과 관련되어 나타난다. 그것은 이 무라는 글자가 촉발시키는 몇 가지 추론의 단서에서 비롯된다. 대표적인 것은 유․무 二分에 입각하여 이 무자를 분별하는 것이다. 어떤 화두건 그에 대한 분별 자체가 바른 공부법은 아니지만 유․무 이분은 조주가 “無”라고 대답한 말로 인하여 촉발되는 특징적 분별이라 할 수 있다. 眞無도 이 분별의 연장선상에 있다.
무자는 조주가 개의 불성이 “없다”고 대답한 말을 궁구하는 것이다. 여기에 “있다”고 한 대답까지 포함시켜 결국은 조주가 있다거나 없다는 대답을 모두 한 것으로 제시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화두인 이상 이 두 가지 사이에는 큰 차별이 없으며, 효과적으로 화두를 들어보이기 위한 의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보통 무자 화두라 하면 이렇게 유․무 두 가지로 주어진 것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관건이 달려 있다. 무자 화두에 대한 慈受懷深(1077~1132)의 게송을 보자.
조주의 입 안에는 雌黃이 있으니 그가 말한 구절에서 누가 길고 짧은 차별을 볼 것인가! 우습다, 얼마나 많은 개들이 흙덩어리를 쫓아가며, 깊은 밤에 까닭 없이 빈집에 대고 짖고 있는가!
자황이란 이미 쓴 글자를 지워서 고치는 도구이다. 조주의 입 안에 자황이 있다는 비유는 무라고 하면 유로 지우고, 유라 하고서도 무로 지우는 수단으로서 이 화두에 대한 이해를 보여 준 것이다. 宏智正覺이 “개의 불성이 단적으로 있다고 말하면 뒤로 와서 오히려 없다고 말해 주며, 단적으로 없다고 말하면 앞으로 와서 오히려 있다고 말해 준다.”고 한 말도 개의 불성이 “있다” 하거나 “없다” 하거나 이 두 가지 답변에는 그 말 자체로 가리킬 수 있는 분명한 뜻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 두 종류의 말은 분별할 대상적 근거가 아니라 상호 소멸을 통하여 각각에 대한 망상분별을 막고 있는 것이다. 유와 무 어느 편이 주어지더라도 다른 한 편을 지우는 수단인 동시에 다른 편에 의해서 지워지는 잠정적 시설이다. 白坡亘璇(1767~1852)이 조주의 유․무 어느 답변이나 일단 주어지고는 자취를 덮어서 없애는 것이라 한 취지도 같은 뜻이다. 유건 무건 결정된 의미가 없고, 분별할 대상도 아니므로 두 가지의 우열을 따지며 궁구할 수 없음을 지시한다. 1․2구가 이렇게 해석된다면 3․4구는 위의 방식으로 설정한 조주의 관문을 오해하는 자들에 대한 냉소적 비판이다. 흙덩어리란 지우는 도구이기도 하고 지워지는 대상이기도 한 잠정적 설정과 상대적 수단으로서의 유와 무를 비유한다. 이 虛한 두 가지 말에 궁구할 實한 내용이 있는 듯이 착각하고 따라 다니는 것에 대하여 개가 흙을 던진 사람을 물지 않고 던져진 흙덩어리를 뒤쫓아가며 짖는 것에 빗댄 것이다.
法成枯木(1071~1128)도 유․무 분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힌다.
있다고 말하거나 없다고 말하거나 쓸데없이 남아도는 말은 없지만, 천 번 외치고 만 번 불러도 고개를 돌려보지 말라. 향기를 찾고 냄새를 쫓으며 다른 것에 미혹되어 따라다닌다면 공연히 시간을 보내고 세월만 허비하게 되리라.
향기와 냄새를 따른다는 말은 흙덩어리를 쫓는 개의 비유와 같은 맥락이다. 유․무 두 가지로 제시한 말에서 착각을 일으켜 분별의 단서로 그 말을 수용하는 일반적인 잘못을 예상하고, 친절하게 미리 방비해 준 것이다. 무자 화두는 이처럼 고개를 돌리고 찾을 만한 그 어떤 것이 숨어 있지 않다. 그러나 동시에 유․무가 자황과 같이 잘못을 교정하는 효용과 기능을 가진 것이기도 한 것이다.
조주 무자에 대한 遷福本逸(宋代 雲門宗)의 게송이다.
불성이 있다고도 하고 불성이 없다고도 하는구나. 똑바른 것을 뒤집었다가 뒤집힌 것을 다시 똑바르게 하네. 맑은 연못에 잠긴 달을 차서 없애고, 눈금없는 저울을 부러뜨려라. 물 속에서 불을 피우고 허공에 말뚝을 박는다. 이것을 눈먼 거북이가 죽은 뱀을 갉아먹는 것과 비교할 수 있으랴! 한 쌍의 어금니를 꽉 다물라.
“불성 ~ 하네”라는 구절은 조주가 번갈아 가며 제시한 유․무의 화두를 말한다. 건져올릴 수 없는 ‘잠긴 달’과 무게를 헤아릴 수 없는 ‘눈금없는 저울’은 그 화두의 몰자미한 속성을 말한다. 특정한 인식의 格에 속박된 ‘눈먼 거북이’가 ‘죽은 뱀’(死句)을 갉아먹듯이 표면적인 유․무의 뜻을 이러니 저러니 분별하는 것으로는 ‘물 속의 불’과 같은 몰자미한 格外의 화두로 제시된 조주의 유․무를 타파하지 못한다.
이상의 내용이 간화십종병의 분류로는 “있다․없다는 대립적 유․무의 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不得作有無會)”는 것에 해당된다. 유․무의 무라고 이해하는 병통은 무자 화두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병통이다. 곧 무라고 제시한 표면적인 말을 통하여 일어날 수 있는 가장 흔한 망상분별이다. 무자를 있다는 것과 대립되는 짝으로 분별하여 그와 관련된 여러 가지 관념을 해석 수단으로 삼아 분별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